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

응답하라 1988

테리(전재민) 2015. 12. 27. 09:28

1987년 제대와 동시에 서울 노량진으로 가서 요리학원등록하고 정독서실에 3개월 끊고 밥값까지 내고 나니 남은 돈은 달랑 몇만원 50만원을 들고 올라가 용기 백배 했던 첫달보단 그다음 달부터 숙식제공하는 일자리 알바를 구하는 게 먼저 였다. 일단 숙식만 제공 된다면 월급이야 얼마가 됐든 상관이 없다고....

노량진 전철에서 내려 육교를 건너자 마나 있던 건물지하에 주점에서 웨이터로 일하면서 낮엔 요리학원을 갈수 있어서 더없이 좋은...

한달후 군대 동기 진훈이가 찾아 왔다. 그친구도 대구서 무작정 상경인데 당장 자고 일할때가 필요한...그래서 평소 늘 봐두었던 레스토랑 토요일 알바자리를 데리고  가서 바로 구할수 있었다. 그리고 그친구는 중국어 학원에 다니다. 인천에 있는 중앙직업훈련원엘 갔고 난 내가 청주직업훈련원출신이라 극구 말렸지만 그렇게 우린 헤어 져야 햇다.

내가 요리학원을 다니면서 바텐더과를 따라 오비맥주 견학따라가서 마음껏 마시기도 하는 줄거운 시간도 지나고 첫 취업지로 신림동 4거리에 있는 양식집로 갔었는데 저녁에 일끝나고 주방옆에 조그만 방에서 웨이터들이랑 자려면 밖에서 문을 걸어 밖에 있는 화장실을 갈수 가 없었다.

그래서 일주일만에 그만두고  다시 일자리를 잡았는데 이번엔 이태원 스텐드바....

이태원 소방서 골목....주방위에 다락방에서 자려면 낮에 자야 하니 더 더워서 땀으로 샤워 하는거 같았고 저녁 6시부터 아침 6시까지 영업시간이라 올빼미 생활...

낮엔 경리 아가씨랑 쓰레빠 직찍 끌고 시장가서 마른안주며 기타 안주거리와 우리 식구들 먹을거 사오고 손님이 없어서 길에나가 삐끼까지 해야 했다.

더 괴로운건 잘려고 누우면 지하나이트 클럽에서 빠따치는 소리에 잠을 잘수 없고 뒤척이고 월급도 한푼 받지 못하고도 깡패두목 사장이 두려워 어찌 하면 이곳을 빠져 나갈까만 생각하고 했었다.

 부인이 정말 이쁜데 경리하는 젊은 아가씨하고도 그렇고 그런 사이 같았다는...가끔씩 마주 치는 나이트 부장도 나에겐 깍듯히 대했다. 사장때문에....난 사실 싸울줄도 모르는 어리숙한 촌놈이었는데...

그렇게 지내다 동원예비군 훈련 나왔다는 핑계로 집에 가 있다가 학원동기소개로 프라자호텔 철도사업부에 들어 가게 됐다.

물론 대방동에 독실을 얻어 지내면서 후에 부천에 방을 얻어 이사하게 되었는데 세를준 주인인 이발소 주인이 아래서 영업하면서도 내가 쉬는날 집에 있으면 집에 살림하는 부인하고 같이 있는게 걱정되 얼마나 자주 올라와 확인하고 눈치를 주던지 또다시 이사하고 추석즈음에 손가락을 동료 칼에 크게 베어 많이 꿰메는 수술도 을지병원가서 받게 되었는데 꿰메고 돌아 오니 주방장이 First Cook이었던 동료에게 니가 그러고도 요리사냐면서 후라이펜으로 머리를 내려치던 일이 생생하다. 일을 못하고 창고에서 쉬던 3일후 갑자기 배가 아파 총주방장이 부천집까지 데려다 준다는걸 더이상 못기다리고 전철을 탔는데 배가 불러와 터질거 같은데다 땀이 비오듯 하는데도 자리가 없어 서있으니 어떤 노인이 앞에 앉은 젊은 사람을 혼내면서 여기 얼굴을 보라고 창백하고 땀을 비오듯 흘리는걸 보니 많이 불편한거 같은데 일어 나라고....

그렇게  부천도착해서 대성병원에서 진찰하니 맹장염이라고 낼 수술한다고 하면서 면도기로 면도하고 ...수술후 깨어 나지 못해 간호사들이 빰을 얼마나 때렸던지.

그리고수술후 소변을 못봐서 고생하니 간호사가 화장실 물 다틀어 놓고 밖을 쳐다 보라고 하던...

추석인데도 병원에 있어야 했고 시골부모님 걱정할까봐 연락도 안하고 병실에서 쳐다보던 달은 왜그리 슬프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