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

산부인과 31병동 3121호

테리(전재민) 2002. 6. 13. 09:31
서울대학병원 산부인과 31병동 21호 병실!

지난 10월26일(1992년)입원하여 11월 18일 퇴원할때까지 아내가 있던 병상의 주소다.

6명의 문패를 달고 밤과 낮을 병마와 싸우던 곳.

지난 10월 26일 새벽2시
그러니까 25일에 텔레비젼을 보고 자정에야 잠이 들었는데 2시에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는 아내의 목소리에 놀라 일어나 보니 아내는 왼쪽 옆구리의 고통을 호소했고 하혈도 하고 있었다.

바로 인천길병원으로 달려 갔으나 전문의가 없어
아침 출근때까지 기다려야한다고 했다.
아내는 아는 의원에 가보자고 했다.(사촌오빠)

일요일이라 강화도 별장에 갔다고 했다.

하지만 거기도 문닫고 아내는 더욱 고통스러워하고 토하기까지 했다.

다시 길병원에 입원하여 분만실로 들어간 아내는 소식이 없었다.
초조하게 밖에서 기다리다 인터폰으로 상황을 물어 볼 수 밖에 없었다.
산부인과 병원에서는 분만실이 중환자실이고 수술도 하는 곳이었다.

새벽녘에 남자의사가 나와서 수술각서를 써야겠다고 한다.
수술중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상황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내용이었고,지금 수술하면 아이 하나는 잃어버릴 가능성도 많다고 했다.(이당시 토미가 1.85kg)

그래서 수술각서를 쓰고 나니
산부인과과장이 나와서 일단 검사를 다해보고 결정하자고 했다.
그래서 내과에 내려가 검사를 받았으나 결과는 허사였다.
아니 내과 과장이 모르겠다고 했다.

오전을 그냥 지내는 동안 난 밖에 대기실에서 안절부절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다 잘못되면 안되는데,걱정하면서 계속 염불을 외고 기도를 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오후에 과장님이 안되겠으니 상태가 괜찮은 지금 서울대학병원으로 옮기라고 하셨다.
서울대학병원 산부인과 31병동 은길상선생님을 찾아 가라고 했다.

손위 처남 차로 서울로 가는 길에서도 마음 한구석은 콩닥 콩닥 두렵기만 했다.

서울대학병원에 도착해서 수속을 밟으려고 하면서
은길상 선생님 찾으라는 것을 깜박잊고 그냥 수속을 하려다 되돌아 설뻔했다가

은길상선생님생각을 하고 간호사실에서 좀기다리다 바로 병실로 입원할 수 있었다.(나중에 안사실이지만 서울대병원에 입원하기위해 6개월이상 기다린는 사람들이 많은데 애들엄마 사촌오빠가 의사라 연결연결해서 빨리 수속할 수 있었다)

바로 6명의 문패가 달린 3121호 병실.

입원하고 침대끝에 이름표를 달고 시트를 깔고 베개카바를 씌우고 환자복으로 갈아입은
아내는 바로 분만실(중환자실-산모라)로 들어갔다.
(출구는 같지만 방은 따로)

아침,점심,저녁 식사시간만 면회 할 수 있고
1시간밖에 안되는 식사시간은 너무도 짧았다.

물론 아내는 식사를 전혀 못해서 내가 대신먹었지만...

환자는 많은데 간호사들은 몇명되지 않고
보호자는 병실에서 초조한 시간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똑같은 처지에 있는 환자들고 금방 친숙해 질 수 있었다.
똑같은 환경에 처해 있고 처지가 같다는 것은 서로의 이해도 그만큼 빠른 법이니까?

일곱달 반만에 아이를 낳은 도가니탕 아저씨네(도가니탕만 가져다 먹어서)는 아이가 폐혈증이라 낳자마자 100만원하는 수입주사를 맞고 인큐베이터에 들어 갔고,
남편이 분만실
의사인 사람도 여덟달인데 같은 병실에 있었다.

제주도에서 왔다는 제주도 산모는 남편이 귤2박스를 가져와 병실사람들 모두 나누어 먹기도 했다.
분만실에서 안 천안이 집인 산모,서산이 집인 제일 젊은 산모,
서울대직원인 쌍둥이아빠네(인공수정으로 남자 쌍둥이)
,대구서 올라온 딸만 셋인 딸부자 아줌마,
미아리서 온 산모,

둘다 말을 하지 못하는 농아로 부부가 밤새워 글로 쓰고 수화로 간호하던 부부,

침대가 여섯인데 우리가 오래 입원해 있다보니 계속 바뀌었다.

아이 낳고 퇴원하고 한밤중에 응급실에서 실려오고 병실은 조용할 날이 없었다.

그래도 우리 병실이 가장 조용하다는 덩렁이 간호사.
밤에 야근을 하던 간호사,모두가 바쁘기만 한데 가슴은 답답했다.

하루에 항생제만 4대를 맞아야했고 피검사한다고 피뽑아 가고 닝겔은 계속 주입되고 (영양제도)

아기 체크하고 (1시간)
소변 받아서 양을 적고 대변도 체크해서 적고,
그래서 병원에서 간호사가 하는 인사는

"소변 봤어요."
"대변 봤어요."다.

계속 하혈은 그치질 않았고 아내는 부어서 몸무게는 늘어만 갔다.
50Kg이 정상인데 임신하고 입원하기전에 60Kg였었고 최고 71Kg까지 늘어 최고로 부었다.
(나도 73Kg인데)

눕지도 일어나지도 돌아 눕지도 못하는 아내를
간호하면서 소대변을 받아 내가면서도 돈걱정과 회사 출근이 걱정이 되었다.

화장실을 1시간마다 가는데

일주일에 한번씩 나오는 병원비는 검사료,특진료등이 많아 의료보혐이 됐어도 엄청났다.

처남께서 돈을 구하러 다니고...
난 출근을 해야만 했다. 휴가를 다 썼기 때문이었다.

장모님께서 낮에 간호하고 밤에는 퇴근하고
밤에는 내가 간호를 하고,아침에 회사로 출근을 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것이 10일,15일,누적되면서
피로가 겹쳐 아내가 불러도 일어나지 못하니까
고통을 견디다 못한 아내는 베게를 던져
보조의자에 누워서 자는 나를 깨우기도 했다.

회사에 우리 부서원들이 정성어린 도움을 주어서,
출근하고도 몇십분씩 눈을 붙일 수 있었다.

그리고 아내는 한약먹기를 고집했고 급성 신장염에 임신중독이란 판정이 나오자 아는 형님이 원장으로 있는 한의원에 전화해 그 형이 10일치를 다려서 가져 왔는데 병원에서 알면 안되는 사안이라 창가 커튼뒤에 숨겨놓고 한약을 먹은지 4일 후 하혈이 점차 줄어들고 5일째 하혈이 거의 없어졌다.

담당의사는 회진을 돌면서 이상하다고 고개를 갸웃거리고...(상태가 너무 빨리 좋아졌다고)

11월 11일 9시,아내가 드디어 수술을 하는 날이었다.

9개월 7일만에애들이 나오는겁니다.(쌍둥이는 만석이 9개월이라네요.)

아이도 아내도 무사하기 위해 지금까지 치료했고
이제 아이를 조산하고 나서 치료하게된 것이다.
담당의사는 쌍둥이라 조산이 아닌 정상이라고 했지만...

수술 시간은 9시인데
애가 나오는 응급환자가 2명이 들어와 시간이 뒤로 밀려났다.

9시 40분에야 분만실에 들어간 아내는 오후 4시나 돼서야 병실로 다시 왔다.

아이는 이미 12시에 보았고
남자아이,여자아이,
쌍둥이였는데 남자아이가 얼마나 나와 흡사하던지 신기하기만 했다.

토미눈은새~까만 눈동자와 큰눈이 얼마나 예쁜지
그리고 신디 눈도 밝은 호수 같이 너무나 밝았다.


남녀 쌍둥이!
남자아이는 2.12Kg ,여자아이는 2.54Kg인데
여자아이가 이상이 있었다.

나와 장모님은 하루종일 아무것도 먹을수가 없었다.
놀란 가슴을 다스니르라고...

다음날 오전 1시간 간호사가 병실로 토미를 데리고 왔지만
신디는 올수가 없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따가울것을 알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신생아실로 우리가 보러가야 했다.

설직한 심정으로 그때는 왜 그리 흉한지
볼때마다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 앉는 기분이었다.





나의 당신

등잔밑은 항상
어둠이듯이
내조하는 당신은
항상 그늘이었네

생일에 생일케익 하나도
사주지 못해도 날 사랑하세요.

쉬는 날이면 잠만자는 날
그래도 사랑하세요.

큰애기처럼 투정부려도
날 사랑하나요.

병상에 누운 당신을
그언제 보다 사랑합니다.

잠을 한 잠 못자고
당신을 쳐다보고 있어도
잠시후면 그립습니다.

한밤 중에
당신을 부축하여 화장실가면서
때론 투정도 부려보지만
당신을 사랑하기때문입니다.

먼훗날
지금도 날 사랑하냐고하면
그렇다고 말하기위해
오늘을 이겨야죠.

가끔은 열이 올라 사경를
헤메고
가끔은 숨이 막혀
간호실에 쫓아 가기도
하지만
날마다 늘어가는 부기는
당신을 더 눕게하고
하혈은 여전한데.

이젠 기도합시다.
완쾌되는 그날을 위해.



1992년 11월 서울대병원 3121호 병실에서 제이가.




12월 18일 퇴원하는 날 우여곡절끝에 퇴원하는 날은 왔는데

오늘은 둘째 아이데리고 대치동 의원을 가야한다.
(서울대병원지정병원)거기서 틀을 맞추어 보고
이틀후 둘째아이(신디)는 다시 서울대 병원에 입원하여 수술을 했다.

태어난지 8일째인 신디를 닝겔 꼿을 곳이 마땅찮아서 머리에 놓을까 하더니 발목에다 놓는데

아니 이의사양반 좀 보소 인턴인지 한방에 못놓고 4번을 찔러서 겨우 됐다 잖아요.

병실의 간호사들은 한방에 놓더만...
여리디 여린 8일째된 어린 아이 발을 보고 신디를 안고 있는 내 손도 왜그리 떨리던지...

그리고 이제는 우리가 아이를 데리고 간다면서
수술실로 데리고 가는데 아이가 안떨어질려고 그러는지
수술하는 걸 알고 공포가 엄습해 왔는지
그 아픈 주사바늘 찌를 때도 그냥 으앙 하고 말던
아이가 크게 울기 시작했다.
나도 눈물을 훔치고...

수술하고 나온 아이를 보니 얼마나 안스럽던지...



다음날 퇴원하고 큰아이(토미)의 심장정밀검사(태어날때 심장에 구멍이 있다고 하였으나 의사선생님이 자연 치유되는 경우도 많으니 걱정말라고 하였지만)

그리고 또 집에서 신디의 대치동 병원에 갔다오고 그렇게 1달 보름이 지났다.
매달 1번씩 서울대 소아과와대치동을 왔다갔다 했다.

형편이 어려운줄 아시고 노동조합여러분이 도움을 주셨다.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터라 단비가 아닐 수 없었다.

이제 신디가 2월말에 또 수술하고
토미는 성장하면서 계속 지켜보자고 의사선생님이 말씀하셨다.(일년후)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살아야 겠다.

한의원 원장이신 형
애들 이름지어준 철학하는 태훈이,
우리 스위스호텔가족 모든분께 감사하고 싶다.
크리스마스 케롤도 느낄 사이 없이 한해가 며칠 남지 않았다.



~~~~~~~~~~~~~~~~~~~~~~~~~~~~~~~~~~~~~~~~~~~~~~~
위의 글은 1992년 신디토미를 임신하여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있던 애들엄마이야기를 스위스호텔노조회보에
게재했던것을 발췌하여 여기에 올린 것입니다.

올리고 보니 그때 감정이 되살아나서 콧잔등이 시큰거리는 걸 참으며 이글을 올립니다.

신디는 아직도 치료중이며 한국에서 4번의 수술경과는 아주 좋아서 담당의사(김석화교수)가 샘플로 사진을 찍어 놓기도 했죠.

자기가 수술한 중에 가장 잘된 수술이었다고 그러더라구요.

캐나다에 이민와서 예약1년후에
아동 병원에서
의사6명이(소아과,치과(이빨),언어교정,이비인후과,외과,소아치과의(잇몸))모여서 상태를 점검했는데
자기네 기술보다 나은 기술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하더라구요.

쌍둥이라고 하니까 토미도 소아과 의사가 진찰을 하더니 괜찮다고 하더군요.

어디서 수술을 했냐고 해서 한국의 서울대병원에서 했다고 했더니 더 놀라는 표정...

지금도 스페셜 닥터에게 주기적으로 가는데 보통 4주에서 6주간격으로
한번 가끔은 일주일에 두번 연속으로 가기도...

신디는 아직도 1번의 수술을 남겨 놓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세금을 많이내는 대신
신디 병원비에서 해방이 되어서 그나마 불평을 안하고 삽니다.

아직도 우리 신디는 그냥 이빨이 나오지 않은걸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 토미는 일년후 서울대 심장전문의 교수 특진을 받았는데 구멍이 없어졌다고 하더군요.
물론 심전도 검사도 받았고요.

우리 토미가 뚱뚱해서 다이어트 해야한다고 하지만
우리는 "뚱뚱해도 좋다 튼튼하게만 자라라"
하고 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