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릴적 이름은 즉 아명은 광주리다.
광주리--->광우리(사투리발음)
학교들어 가서도 오랫동안 광우리로 부르는 이웃이 많았으니
초등학교입학할땐 너의 이름은 재민이라고 가르쳐줘도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왜냐면 광우리로 계속 불려 졌었으니까
재민아 하고 부르면 안돌아 봐도 광울아 하고 부르면 얼른 돌아봤다.
아명이란게 어릴때 역신을 쫓기위한 방편이었다고 한다.
나를 낳자마자 광주리에 담아 두었다는데 그러면 병없이 오래 산다고 해서 그리 했다고 한다.
모두 10남매를 낳아서 3남매만 살아남았으니 그럴만도 하다.
땅을 그래도 꽤나 개간하였던 아버지가 어느날 트럭한대랑 와서 이불보따리만 가지고
고향에서 도망치듯 온것이 제천 산곡동의 곡담이란곳이고
그곳에서 남의 집 머슴일로 시작해서 새롭게 삶을 시작하셨다는데
그때 까지 이미 많은 자식을 앞세운 상황이어서 어떤 용한 사람이 그렇게 이사를 하면
자식을 죽이지 않고 얻을 수 있다고 해서 그랬다고 한다.
그렇게 와서도 누나(11살위)와 나사이에 5명을 나아서 3살에서5살정도 키우고는
다들 시름 시름 앓다가 죽었다고 한다.
해서 10남매의 9남인 내가 장남이 되고 막내인 동생이 살아 남았다.
나또한 어려서 병치레를 많이 해서 저거 또 저러다 죽는거 아닌가 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낳자마자 광주리에 담아 놓으면 병치레 안한다고 했는데도 그랬다고...
그래서 마흔이 넘어 얻은 장남
내가 출생한 곳은 초가집이었지만
안방 웃방 사랑방이 있고 부억이 넓은 비교적 큰집이었다.
대청마루에서 내다보면 앞산과 밭들이 펼쳐져 있었고
왼쪽으로 장독대와 광,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다 이용한 디딜방아도 있었다.
그리고 오른쪽 입구쪽으로 외양간과 변소가 있었다.
뒤뜰엔 파도 심고,도라지도 심고 오래된 복숭아 나무,호도나무도 있었다.
그리고 돌담바깥으로 앞밭엔 마늘도 심고 당근도 심고 그렇게 텃밭에서 나는 것으로
우린 충분히 먹고 생활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3학년때까지인가 우리 동네엔 전기가 들어 오지 않아
호롱불아래서 생활했다.비슷한 나이의 아이들보다 문명의 이기를 아주 늦게 받아 들인 셈이다.
아직도 애들엄마는 이얘기만 하면 아주 영감하고 이야기 하는 느낌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전기가 들어올때쯤에 우리집에도 라이오를 샀다.
뒷집인 원규네는 이미 가지고 있던 라이오를 우리도 산것이다.
그런데 엄마도 아버지도 누나도 라디오 켤줄을 몰라 손을 못대고 있을때
내가 이것저것 만지다가 볼륨을 최고로 올려놓고 시작 버튼을 눌렀다.
소리가 얼마나 크던지 다들 놀라서 뒤로 자빠졌다.
그리고 우리 동네는 두레박우물을 길어다 썼는데
5가구가 쓰기엔 충분한 물이 항상 넘쳐났었다.
가끔은 우물에 물건이 빠져 들어가 주어 오는일도 있었고 우물을 청소하기위해
형들이 들어 가기도 했다.
겨울이면 닥나무에 줄을 메서 활을 만들어 수수대로 만든 활을 만들어 활쏘기를 하고
여름엔 뱀잡으로 다니고 중터리(송사리)잡아서 매운탕을 끓여 먹기도 했다.
물론 개울가에서 멱감는 건 당연한 것이고 당연히 벌거숭이들이었다.
고무신 코를 접어서 기차놀이를 하고....
수박서리,목화송이 서리,사과서리 가을엔 콩서리...
콩서리하면서 불에 구운 콩을 주워 먹은 아이들의 입은 새까맣게 그을렇고 수염도 그렸었다.
겨울이면 앞산에 넘어가는 고갯길에서 비료포대에 보릿집을 넣은 썰매를 신나게 탔다.
가끔은 밭두렁에서 타면서 덜컹대는 맛이 얼마나 좋았던지...
정월보름엔 망우리(불꽃놀이)돌리다 안쪽 큰마을 아이들이랑 패싸움이 붙어
망우리 깡통을 던지고 조약돌을 던지고 하다가 그네들으 인해전술에 밀려 집에 숨어들기도 했다.
돼지XX라는 놀이와 오징어는 땅뺐기 놀이 였는데 그놀이를 하다가
뽀죽한 돌에 내 머리을 들여 받아 이마가 구멍난 사건이 있었는데
내이마가 구멍나서 피가 콸콸 쏟아져 나오니 하늘에 까마귀떼가 새까많게 몰려 들었고
고개을 뒤로 졋히고 누나가 손으로 이마를 막고 집으로 오면서 누나도 놀라서 얼마나
울던지 말썽꾸러기 동생을 또 잃는지 알고 놀랐다나...
그리고 집에 와 누워 있는데 그 구멍난 이마에 된장을 붙이면 빨리 낫는다고
된장을 갔다 붙이는 엄마 얼마나 쓰라렸던지 정말 눈을 뜰수 없을 정도 였다.
그리고 나중에 원규아버지가 대한통운 소화물다니는데 오징어 뻐를 구해와서
그걸 갈아 붙여서 아물수 있었다.
후에도 기침이 심해져서 결국 시내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으니
한쪽 갈비뼈부분이 아예 하얗게 나와서 치료를 하느라 고생하기도 했다.
동네놀이터에서 태권도를 배우다 원규는 그쪽(oo)을 맞아서 기절해 큰일 나는 줄 알기도 했고
난 홍골연못에 갔다가 물에 빠져서 2번을 아래로 가라앉다가 구조되기도 했다.
그런 나의 동네 나의생가를 떠날 수 밖에 없는 사건이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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